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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로 필사하기 국민학교 1학년 입학한 3월에만 십여 일 넘게 병결 처리가 되어있는 학생부를 본 적이 있다.
빨간 소변을 보는 나를 둘러업고 병원을 갔다가 학교를 지나 귀가하는 산복도로 길 위에 엄마가 근심 걱정 한숨소리를 쏟아냈던 것도 같다. 골골거리는 딸이 학교를 가는 것만으로도 너무 흡족했던 엄마는 가방을 챙기며 연필 12자루를 매일 검정 손잡이 도루코 연필 칼로 손수 깎아 넣어주셨다. 1학년 담임선생님께서 방과 후 경필 대회 연습을 시켜주셨기 때문이었다. 그때 배운 한글 정자체는 -모양은 많이 변형되었지만- 쉰 넘은 내 오른손이 기억해 낸다.
그 이유에서인지 나는 연필과 같은 필기구에 욕심을 조금 혹은 많이 가지고 있다. 구입 여부를 떠나 문방구를 기웃거리는 걸 취미라고 당당히 얘기하기도 했다.
호텔에 머물 때에도 연필이 준비된 곳은 늘 한 자루씩 챙겨 오곤 한다.
필사의 맛은 연필로 쓰기이고, 뭉툭해지는 심을 깎는 조용하고 사각거리는 시간은 또 연필 사용의 맛이다.
12자루를 깎아주시던 엄마의 정성은 이제 가슴에 묻혀있고, 연필깎이를 돌돌 돌리는 나는 고개 숙이고 연필 깎는 것에 집중하던 엄마를 추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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