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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이 빛에 물들때까지나는 살아있다 2020. 6. 16. 14:02
엄마!
컬러링이라도 해봐~
무료하게,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을 시간을 멍하게 보내고 있는 나를 보고 딸이 한마디 한다.
예전 지인이 선물해 준 아트 테라피 컬러링 북... 완성이 없다... 기다리고 있어.....
내 마음이 움직일 시간을.
열대 식물 온실 속에 들어온 듯한 더위가 지속되자 에어컨 바람 몇 줄기에 의지해 겨우 숨만 쉬고 있다.
그런 날씨 탓을 해본다.
여름 더위 냄새가 싫다. 들큼한 조미료 냄새 섞인 덥고 습한 여름은 어디로 피해도 출구 잃은 공간에 갇힌 공포를 준다.
겨울을 기다린다. 숨통을 틔워 줄, 폐 깊숙이 쭉 밀고 달려 명치까지 시원하게 뚫어 줄 차갑고 맑은 겨울 공기 향을 기다리고 있다.
집안을 십여 일 동안 벗어나지 않고서 옷장 속을, 이불장을, 서랍장을, 책장을, 화장대 위를, 편지 상자를 차례차례 정리했다.
정리의 핵심어는 '주변정리'
내가 만약, 만약에 갑자기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의미 없을 것을 정리해본다. 한 번쯤 사용할 것 같아서 남겨뒀다가 몇 년을 묵혀두는 것들도 버렸다. 일이 년 사이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것도 버리고 나니 살림살이의 1/3 정도를 덜어냈다.
크게 표시 나지 않지만 쌓이고 겹쳐 구겨져 있던 것이 여유롭게 자리 잡는 가벼워진 집안을 바라보며, 순간 비우고 닦아낸다는 행위는 새로운 것으로 옮겨가거나, 무언가에게 마음을 움직여야 할 때, 깨끗이 닦여진 시야를 확보해 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난 어렸을 때부터 생각이 무거워지면 바닥을 쓸고 닦았다. 걸레로 수세미로 솔로 문지르고 묵은 때를 벗겨내며 생각을 덜어내고 정리하곤 했다.
지금의 난 생각을 상실했다. 많은 기억들을 삭제시켰는지, 드문드문 기억도 조각나 있다.
육체의 많은 부분을 베어내며 고단해진 몸과 자꾸 잠만 자고 있는 생각만 남겼다.
하고 싶은 것이 많아 그 욕심으로 몸이 달았던 8년 전과 다르게 또 한 번 더 어두운 터널을 기어 나온 지금의 나는 터널 끝 빛에 눈이 부셔 뜰 수가 없다. 쨍하고 아릿한 눈부심에 난 걸어가야 할 길을 찾지 못한다.
그냥 가만히 기다리고 있어...
내 눈이 서서히 빛에 물들 때까지.
내려놓아야 함과 동시에 붙잡아야 할 그 무언가가 필요한 시간이다.
20180805
오늘 날짜를 선뜻 꼽지 못하는 나는 멍하게 초조해졌다.
* 두 번째 암 치료과정이 마무리될 즈음 남긴 글을 옮기고 수정한다.
한바탕 시련이 끝나면 주변 사람들이 자꾸 재촉한다. 나를 위해서 하는 조언이라는 것을 안다.
건강을 위해 산책이라도 하고, 건강 식단대로 의지를 가지고 식사하고 의욕적 활동을 시작해보라고 한다. 모두 맞는 말이라는 것을 머리로는 안다. 하지만, 내 마음은 모른다. 정말 비어있다. 텅 비어있다. 아무도 모른다.
첫 암 치료를 끝내고 1-2년이 지나자 조금 의욕이 생겼었다. 내가 완전하진 않지만 그래도 일상생활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해했고, 할 수 있다란 자신감도 생기기도 했다. 하지만, 두 번째 암 치료를 끝내고 예방적 난소 자궁제거를 한 지 2년이 지난 지금도 난 특별한 의욕이 없다. 그저 코 앞까지 다가온 '끝에 대한 두려움'과 '건강염려증 비슷한 것'에 갇혀만 있을 뿐 다시 일어나기 위한 행동 의지는 없는 것 같다. 이걸 해서 뭣하나 하는 생각만 맴돌 뿐.
일어 설 이유를 억지로 만들기 위해서라도 내가 정말 무엇을 하고 싶은가.. 에 대해 오래 생각해 보기도 한다. 그나마 내가 실행할 수 있고, 숨통 트일 수 있을 글쓰기를 붙잡는다. 한 번 살아내보려고. 2020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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