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107 항암1차 3주차
갑자기 A Simple Life라는 말이 생각났다.
약 기운이 혈관 끝까지 훑어내어 내 몸의 털을 밀어내 버린 순간.
목구멍으로 스멀스멀 올라오는 항암제 약 냄새.
내 방과 내 욕실에서 내뿜어지는 표현키 어려운 메슥거리는 약 냄새.
첫 항암제 주입 후 20일째 오늘 정신이 가장 명료해진 거 같다.
항암제 투여후 10일 만에 어김없이 열이 38도를 넘겨 격리 치료실을 거쳤다.
(2009년 6번의 항암약물치료 때 매번 고열과 면역 수치 바닥을 경험했었다.)
열이 오르면 응급실로 바로 오라는 코디네이터의 조언대로 병원을 갔으나 1인 격리실을 배정받지 못해 응급실 격리치료방에서 악몽 같은 하룻밤을 지냈다.
(응급실은 밤새 구급차가 앵앵거렸고, 우는 아기와 부모가 있고, 위급환자들의 생명이 오고 가는 곳이었다. 가벽 하나 사이로 그 모든 소란을 극도로 예민해진 몸과 정신으로 받아내기란 정말 악몽이었다.)
뜬금없이 왼쪽 눈 다래끼가 발진하여 누군가에게 맞은 듯 퉁퉁 부어올라서 한쪽 눈을 뜰 수가 없고, 몰골이 엉망이었다.
항암치료 중 고열 동반 면역 호중구 수치가 바닥일 때는 세균 감염의 우려가 있어 마스크가 필수가 되고 병원 내 이동도 금지된다. 안과에서 응급실 격리치료방으로 문진 왔으나, 현재 어떤 조치를 취하기엔 면역이 너무 약해 조금 두고 보자는 말만 남겼다.
다음날 저녁에서야 1인 격리 치료실로 옮겨져 면역주사와 항생제를 맞고 진땀을 흘리고 끙끙거리며 3번의 밤을 지내고 나자 눈 다래끼가 조금씩 나았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항암제를 맞고 나면 내 몸속 좋은 세균마저도 싹 쓸어 버리는 바람에 가장 취약한 부분이 터져 오른다고 한다.
8년 전과 달리 요즘엔 첫 항암 후 고열 발생과 면역수치 저하가 증명되면 다음 항암제 투약 후부터는 24시간 지나서 바로 면역주사(롱 퀵 주사)를 의료보험 적용하여 미리 맞을 수 있단다. 구토 증상 완화 패치를 붙여주고 각종 부작용 완화 주사와 약 덕분에 구토는 지난번보단 나아졌으나 입안은 헐었고 부드러운 항암환자용 칫솔과 가글로도 가시지 않는 구역감은 늘 따라다녔다. 모든 것이 약해지고, 모든 일상이 낯설어졌다. 평범한 하루를 애 끓이며 소망하게 되는 순간이 시작됐다.
내일 또다시 항암 화학약물을 몸 속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2차 투약 전, 정신이 조금 맑을 때 생각을 해야 한다. 내가 들었던 앞으로의 치료과정을 머릿속에 정리하고 각오를 다져야 할 시간이다.
수술실을 몇 번을 더 거쳐야 나의 기대수명을 몇 년 더 보장받는단다. 유방암 전문 간호사가 유전자 검사결과지를 들고 와 내게 이런저런 설명을 첫 항암주사를 맞는 날 해주었다. 유방암이 두 번(30대 후반, 40대 후반) 발생했고, 두 번 모두 삼중음성 유방암으로 판명되어 유전자 검사를 의료보험적용 시행해 주었는데... 나는 'BRCA 1' 보유자란다. 앤젤리나 졸리가 갖고 있어 그녀는 미리 양쪽 유방 모두 절제해 버렸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고 그때 그것이 과잉반응 아닌가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브라카 원을 갖고 있어 변이 된 유전자가 발암을 자꾸 시킨단다. 유방에도 난소에도 발암 될 확률이 높아진다. 나는 양쪽 유방을 부분 절제했으나, 앞으로 전체 절제를 해야 할지도 모르고, 난소암 발생 가능성이 높으니 예방적 난소 절제술을 권장받았다. 그러한 모든 절차 후에야 내가 보장받게 되는 기대수명이 유방암 발생 환자 평균 수명에 3.1년을 더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니... 비참해졌다.
비참하다는 감정이 맞는거지?
수술을 했고, 앞으로 4번의 항암약물치료를 받고, 33번의 방사선 치료를 거쳐 난소 자궁절제를 해야 기대수명을 보장받는다는 것.
내가 이겨내야 하는 거지?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굳이?
8년 전, 6번의 약물치료와 유방 부분절제 수술과 케모 시술 2번과 33번의 방사선 치료를 받고 10회 심리상담을 거치며 겨우 일어섰다. 오른쪽 겨드랑이 임파선을 거의 모두 떼내어 감각 잃은 오른팔을 이제 겨우 곧고 높게 귀 옆으로 붙여 올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런 나에게 또?
항암 치료 후 나이 마흔에 폐경을 마주 했고 마흔아홉을 앞둔 나에게 이젠 여자로서의 모든 흔적을 지우라 한다.
이거 분노해도 되는 거 맞는 거지?
병상 위에서 어떤 자세로 누워도 온 몸이 아리고 저려 신음소리가 저절로 새어 나오고, 찐득한 약 냄새 섞여 쏟아내는 식은땀 냄새에 구토하는 이 지랄 맞은 시간에 내게 생각이란 건 한 톨도 없다.
미용실에서 또다시 머리카락을 밀어내고 남편이 면도날로 잔머리 털마저도 깎아내면서 영혼마저도 삭제되었다. 눈동자는 빛을 잃고 흔들린다.
나와 먼 얘기들이 사실이 되어 다가온다.
원하든 원치 않던 '심플 라이프'를 강요받았다.
미래 어느 날을 꿈꾸기보다 지나간 과거를 정리하고 나 자신을 겨울나무로 만들어 견뎌내야 할 시간이 왔다.
때가 되었다.
봄꽃을 맞이 할 수 있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길게 허락받으려면 털어내고 털어내어 나 자신을 가볍게 더 가볍게 만들어야 할 시간이 왔다. 이 생각만은 가슴에 새기자. 꼭 새기자.
*20180107 작성해 놓은 몇 줄 생각에 2020년 그때를 회상하며 살을 붙여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