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story

Anne with an 'E'

annegreen 2020. 7. 15. 18:15

Please call me Anne! Anne with an 'e'!

 

당당하게 그녀의 이름을 빌어 쓰기 시작한 지 30년쯤 됐나 보다. 영어학원을 다니면서 꼭 갖게 되어야만 하는 영어 이름으로 나는 주저 없이 '앤'을 선택했다. 국민학교 다닐 때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강머리 앤 노래를 접해보지 않은 내 나이 또래 여자아이는 얼마 없을 것이다. 갈색머리가 되길 꿈꾸던 빨강머리 앤, 버즘 프렌드(bosom friend) 다이애나를 너무나 사랑했던 앤, 경쟁자로 동반자로 사랑했던 길버트 브라이스, 앤의 입을 꼬매버리고 싶었을 마릴라, 재잘재잘 앤을 태우고 화이트 블러썸 레인을 첫걸음 열어준 매튜... 이 모든 관계를 나는 기억하고 있는가?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의 푸른 들판과 바다, 단풍나무와 푹푹 쌓였던 눈밭을 어디까지 내 상상의 나래로 펼칠 수 있었을까?

 

내가 알고 있었던 빨강머리 앤은 원작의 일부분이었다는 사실을 스무 살이 넘어서 알게 되었다. 국민학교 시절 560원 쯤 했던 동화책은 닳아 없어졌는지, 이사 다니며 사라진 건지 여하튼 잃어버린 후 늘 마음 한 편에 다시 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서울에 올라와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처음 맞닥뜨린 몇 권씩 되는 퍼핀 클래식 앤 시리즈에 놀랐고, 그 후 동서문화사에서 번역되어 나온 앤 시리즈는 10권인가 그 이상이었던 것도 같은데 두어 권밖에 사놓지 못했다. 내가 알고 있는 앤은 'Anne of Green gables'. 한마디로 초록지붕 집 앤만 알고 있었던 거다.

'Anne of Windy Willows'

'Anne's House of Dreams'

'Anne of Ingleside'

 

 

나의 빨강머리 앤 Anne Shirley

 

 

 

1995년에 구입한 원서는 책꽂이에 꽃혀 누렇게 바래지고 있다. 초록지붕 앤은 겉핥기로 한번 읽어낸 것도 같다. 레드몬드 시절 앤도 조금 읽었던 것도 같다. 내 후진 영어 독해 능력으로 띄엄띄엄 읽어냈던 책 속에 앤은 선생님이 되고, 교장선생님이 되고, 고약한 동료 노처녀 선생님과의 티격태격도 있었고, 마릴라가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함께 가서 훈훈하게 크리스마스를 보냈던 것이 기억난다. 

이름을 빌어 쓰고 있는 나는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자전적 이야기가 섞여있다는 '앤'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것일까? 몇 년 전에 버지 윌슨이 '그린 게이블즈 앤'의 초입 부분 몇 줄의 이야기에 영감 받아 쓴 '빨강머리 앤이 어렸을 적에'라는 책을 읽었다. 앤의 부모님 얘기와 초록지붕 집으로 오기 전까지의 일들이 펼쳐져 있었다. 너무 힘들었지만, 견뎌내기 위해 꿈꾸지 않으면 안 되었던 고된 11살 주근깨 고아 소녀가 에번리 기차역 의자에 앉게 되기까지의 여정이 담겨 있었다. 내가 11살 앤의 나이 즈음 꿈꾸지 않고 상상하지 않으면 끝없이 추락하는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이야기가 있어 살았다. 앤을 품을 수 있어 나를 옭아매고 있었던 어둠이 짙던 순간에 다른 세상으로 날아갈 수 있었다.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꿈을 주고, 자연과 사람과 사물을 사랑하는 방법을 알려 준 '빨강머리 앤'.

최근 넷플*스에서 드라마로 나와 EBS로 방영 중인 것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여지없이 내 마음은 뜀박질하기 시작했고, 오래 묵혀 있는 책을 꺼내 바스라질까 조심하며 한 줄씩 읽어 본다. 25년 전 사놓았던 책 속에 110년 전 그녀가 조잘조잘 끊임없는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영원한 내 사랑, Anne이 두 눈에 빛을 담고 웃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