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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춧가루 한 톨 들어간걸 귀신같이 혀가 알아챘다.
미원(조미료) 한 숟갈 머금은 느낌이라고 내가 표현했던 항암약물치료 시 입 속. 들큼한 냄새만 가득한 입안은 온통 하얗게 껍질이 일어나고 혀도 하얗게 부어있는 느낌이다. 잇몸도 모두 들고일어나고 치아마저도 들떠 있는 것 같다. 입 안 개운함을 찾아 삼만리 하고 싶었다. 생수에도 조미료 맛이 난다. 칫솔질도 할 수 없어 가글링을 하지만, 가글 향이 또 맞지 않는지 구토를 유발한다. 병원 처방 가글이 너무 세서 돋아난 혓바늘이 쓰린 것 같아 다른 여러 브랜드 가글을 찾아본다. 리*테린 녹차향이 조금 나은 것 같아 이용해 본다. 가글병이 욕실 선반을 채워간다. 못마땅하다. 정말 저절로 짜증이 목으로 치밀어 오른다.
맛을 느끼지 못했다. 혀가 묵직했는데, 매운맛만 났다. 그것도 광폭되어 느껴졌다. 좋아하는 김치를 먹을 수가 없다. 개운하게 입안을 달랠 수 있는 게 없다. 언니가 백김치를 담아줘서 먹었는데, 김치 냄새를 또 맡을 수 없으니...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매운맛은 미각이 아니라, 통각이란다. 통증으로 다가온 매운맛으로 개운한 맛 찾기를 포기하니, 먹고 싶은 것이 거의 사라졌다. 병원에서 항암환자 식단관리 교육을 받았는데, 단백질 섭취를 강조하여 2009년엔 개고기까지도 괜찮다고 할 정도였다. 뭐든 입에 당기는 것은 무엇이든 먹어야 한다고 했다. (단, 간 해독 부담을 높일 수 있는 한약재 사용은 하지 말라했다.) 2017년에는 한 가지 다른 것은 공급 경로를 확인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개고기는 금한다는 것. 항암환자들이 이겨내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영양실조라는 사실이 얼마만큼 먹는 게 힘든 일인가 알 수 있다. 정말 힘들 때는 유동식으로 뉴케어 제품도 권장받았는데, 나는 한번 맛보고 속이 더 좋지 않은 것 같아 먹지 못했다. 항암환자의 반응은 개인마다 많이 다른 것 같다.
단백질을 많이 섭취해야 다음 항암약물을 받아들일 몸상태를 만들 수 있다한다. 백혈구, 헤모글로빈 등 각종 수치를 높이려면 일단 많이 먹어줘야 한다. 2009년 첫 암 치료 때 아무 준비가 없던 남편은 나를 위해 고군분투했다. 신선한 채소를 먹어야 하지만, 생식은 금지였으므로 요리를 해야 했는데 궁여지책으로 근처 보리밥집에서 각종 요리된 나물을 사 왔다. (나물은 고춧가루가 들어가지 않고 들기름과 장을 사용해서 먹기 좋았다.) 사골국을 시누 형님이 해 오셨는데, 밥 한술 말아 삼키기엔 좋았지만, 끓일 때 냄새가 집안 곳곳에서 잡아내는 예민한 후각에 얼마 먹지를 못했던 것 같다. 미각은 멈추었고, 후각은 극도로 예민해졌다. 밥 냄새, 김치 냄새, 헤이즐넛 커피 향에도 토했던 입덧 때와 같았다. 3주 간격으로 행해지는 약물투여 과정에서 마지막 3주 차에는 기력 보충에 총력을 다해야 하는 기간이며 그나마 가장 기운이 있는 기간이다. 그땐 남편 손에 끌려 운동 겸 산책하여 삼계탕 집에 가서 닭고기를 먹었다. 껍질을 벗기고 살코기와 찹쌀 속을 국물에 적셔 먹었다. 껍질째 먹는 과일은 안되고, 잘라 냉장보관 시 세균 번식도 조심해야 해서 차라리 포도주스와 야채주스로 마셨다. 얼음을 입에 물면 순간 입 속과 식도가 시원해서 많이 좋아했다. 가족들과 식기류는 따로, 자주 열 소독하여 사용하였다. 가능하면 화장실도 따로 사용하는 것이 좋다.
항암 주차가 늘어갈수록 먹는게 이런 고통이 없었고, 나중엔 힘 잃은 손이 숟가락을 놓치거나, 나도 모르게 입가로 흘러내리는 음식물을 느끼고는 '이래 살아내는 게 옳은가...'라는 자괴감에 눈물이 났다. 눈썹 없는 눈에는 눈물이. 코털 잃은 코에서도 눈물이. 눈물 떨어뜨린 차가운 물 말아 올린 밥 한 숟가락에 목숨이 달렸던 시간이 있었다.
살기 위해 먹어내야만 하는 시간. 그때, 단골 삼겹살 식당에서 후식으로 내어주는 '식혜'가 당겼다. 살얼음 얼은 식혜는 불타는 내 속을 시원하게 달래주었다. 식당 사장님께 좀 사갈 수 있겠냐고 말씀드렸더니, 흔쾌히, 무려 공짜로 식혜를 2리터 페트병에 담아주셨다. 떨어지면 언제든 또 오라고. 먹고 얼른 회복하라셨다. 평소 좀 무뚝뚝한 사장님이셨는데, 그 배려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 식당에 다시 가지는 못하고 항암이 끝날 때까지 비*식혜를 애음했다.
2017년 말, 2018년 다시 항암약물치료를 해야 했다. 병기가 1기라 항암약물치료 횟수는 줄었지만, 예전 기억으로 더 절망스럽게 여겨졌다. 기억의 창고에 안간힘으로 밀봉해 놓았던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남편 대신 갓 스물 된 딸이 내 곁을 지켜주었다. 주말마다 귀가하는 남편은 최선을 다해 주었지만, 부재의 시간을 메꿨던 것은 눈만 붙은 것 같은 딸아이를 데리고 항암치료를 해내야 하는 엄마로서의 뜨거운 책임감이었다. 나 자신을 돌봄과 동시에 내 자식의 안위도 확보해 줘야 한다는 모성이 지배하여 이겨냈던 것 같다. 근육통과 고열에 시달리면서도 혼자 열 체크하고 병원으로 가야 하는 타이밍과 동선의 매뉴얼을 신경 써야 했던 그 시간들이 내 마음에 커다랗게 얼룩 되어 남겨졌다.
이번엔 그래도 경험치가 있어 요령도 생겼다. 매운맛도 약간은 견뎌낼 수 있었던 것도 다행이었다. 열량이 높고, 여러 가지가 많이 들어간 콤비네이션 피자와 햄버거도 과감하게 주문해서 먹었고, 몇 젓가락을 먹더라도 약간 매콤 달콤한 베트남식 비빔 쌀국수도 시도했는데, 의외로 괜찮았다. 여전히 식혜를 좋아했고, 부드럽게 찐 달걀찜과 호박, 당근, 양파로 끓인 순한 맛 카레도 먹을만했다. 매실액에 시원한 생수를 넣어 마시며 메슥한 속을 달랬다. 약간의 부작용이 있더라도(설사와 같은) '무엇이든 먹어야 항암을 이겨낸다.'란 원칙을 최우선 하였다.
항암 2주 차 최저 컨디션에 약을 먹기 위한 밥도 못 넘기는 나를 위해 딸아이가 마트에서 장을 봐왔다. 한참을 뚝딱거려 나에게 차려준 식탁 위에 '토마토 소시지 수프' 한 그릇. 가끔 엄마가 만들 때 채소 자르기를 거들며 어깨 넘어 배운 대로 해봤단다. 축 쳐진 팔을 들어 올려 한 숟갈 입에 넣은 딸아이 표 토마토 수프에 눈물이 핑 돌았다. 맛이 있다. 맛을 잃은 혀가 수프 맛을 기억해 냈다. 힘을 얻는다. 수프 한 그릇에 살아낼 힘을 얻었다.
고마웠다. 어리다고 생각만 했는데, 내게 의지할 수 있는 자그마한 어깨를 내어준 딸이.
잃어버린 입맛을 돋워주기 위해 밑반찬을 만들어 가져다준 친구들이.
식혜와 백김치를 담아준 언니와 맛난 음식을 사 주신 형님들이.
얼마전 딸과 오랜만에 만들어 본 토마토 수프... 고마웠어~ 딸~ 파 기름을 내어 마늘, 베이컨을 볶고, 양파, 감자, 샐러리, 토마토를 잘게 썰어 함께 볶다가 고춧가루를 조금 넣는다.( 매운걸 못 먹으면 고춧가루는 생략) 볶은 재료에 월계수 잎 몇 장 넣고 물을 붓고 끓이다가 마지막에 적당한 크기로 썬 통통한 소시지를 넣고 한소끔 더 끓인다. 마지막 간은 치킨스톡 가루 조금과 소금, 후춧가루로 마무리하여 팔팔 끓이면 끝. 채소는 냉장고에 들어있는 어떤 것도 대체 가능한데, 최근 양배추를 넣으니 국물이 더 시원하였다.
누군가의 말처럼 의학기술은 발전하였고, 항암 부작용을 대처하는 여러 처방이 주어져서인지 약 10년 전 보단 견디기 나아졌다. '처음'은 너무 몰라서 끝 모를 두려움만 깊어지고 앞가림이 없었다. 두 번 째에는 병원에서 안된다고 한 것만 조심하고 가능한 것의 폭을 넓혀 내가 견뎌내는 것만 신경 썼다. 입맛을 잃으니 모든 것이 무너져 특히 입안 건강을 신경 썼는데, 이번에는 병원 약국에서 구입한 항암환자용 칫솔(매우 부드러운 모)과 프로폴리스 치약을 사용하거나 가장 최저 컨디션일 때는 병원 처방 가글액과 소금물을 번갈아 이용하였다.
항암 과정 중 같은 처지의 환우들과 얘기할 기회는 별로 없다. 각개전투 중이기 때문이다. 방사선 치료 때쯤 비로소 몇 분과 교류가 있었는데, 이겨내는 방법들이 다양하고 다들 힘든 생존의 산을 넘어와 사연도 깊었다. 나와 같은 어려움을 맞닥뜨린 어느 누군가에게 내 경험을 내보이고, 조금의 위안과 도움이라도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남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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