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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살.아.있.다.나는 살아있다 2020. 6. 18. 14:48
선릉과 정릉에서. 20180516 ‘큰 병원으로 꼭 가보셔야 할 것 같고요, 석회가 보이면서 초음파에 이렇게 잡힌다는 건 그럴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태연하게, 침착하게 설명을 듣고, 초음파 CD와 엑스레이 사진 그리고, 3차 의료기관 진료의뢰서를 들고 동네 단골 의원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느린 엘리베이터를 뒤로 하고 느릿느릿 뒤돌아 계단을 두어 걸음 내려 선 순간 눈앞이 뿌옇게 변했다. 아닐 거야. 그럴 가능성이겠지. 2009년 4월 14일. 건강보험공단에서 40세 생애전환기 특별 종합검진에서 초음파까지 약간의 비용을 추가해서 속 편히 검진을 받아보자는 의도였다. 오른쪽 가슴에 뭔가가 멍울진 느낌에 서둘러 받아본 그. 날. 이 시작이었다. 암환자로서 인생이 시작된 날...
주위로부터 급히 병원과 교수님을 소개받고 진단을 받았다. 2기 중후반 정도의 암 진단이 나오고 담당 간호사가 내민 중증환자 서류를 작성하며 나는 중증환자가 되었다. 보험공단에서 90%를 부담한다는 의료체계에 놀라워하며, 가벼워진 부담에 정말 고마움을 느꼈다. 사실 ‘암’이라는 진단에 정신을 반쯤 놓아버리게 되는 상황에서 경제적 부담까지 더해졌다면 더 힘들었을 것이다. 치료를 시작하기 전, 교수님이 우리에게 과정 선택권을 주셨다. 바로 수술하고, 항암약물 치료할 것인지. 아니면, 항암치료부터 하고 수술하는 과정에 들어갈지. 우리는 후자를 선택했다. 암세포를 줄이면 전체 절제를 피할 수도 있을 것이며, 운 좋게 암세포를 모두 없애버린다면 예후가 좋다는 설명이셨다. ( 치료 후 5년 생존율도 훨씬 높아질 것이다.) 무슨 말인지 솔직히 바로 와 닿지 않았지만 의료진의 판단에 전폭 의지하고 싶었다. 난 착한 환자가 되고 싶었다. 사람이 아프게 되면 누군가에게, 특히 내 병에 관해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을 의사 선생님에게 몽땅 의지하게 되나 보다. 진단받은 지 5일 후 하던 일을 대충 정리하고 입원하였다. 10년간 하던 일을 정리하며 거짓말처럼 주변정리가 쉽게 되는 것이 실감 나지 않았던 그 시간까지도 나는 덤덤하였다. 아니 내 감정이 그러하다고 생각했던 것도 같다. 다가올 과정을 모르므로 두려움도 없었다. MRI, PET-CT, 뼈 검사, CT와 같은 여러 검사들을 받고, 항암주사로 인한 혈관 파손을 대비하여 왼쪽 가슴에 케모포트를 부분마취 수술로 삽입하였다. 그때부터 진짜 환자가 되었다.
다음날 4월 24일, 무시무시했던 나의 첫 항암 주사액이 몸속에 흘러들어왔다. 구토, 소변도, 심지어 식은땀마저도 붉게 물들게 하는 지독했던 항암주사를 맞은 10일 후, 38도가 넘는 고열과 끝없이 떨어지는 면역지수로 첫 항암부터 응급실을 거쳐 격리입원 치료를 받았다. 어디가 아픈지도 모를 몸과 아득해지던 정신.. 항생제.. 그리고 까부라지듯 잠.. 또.. 잠.. 온몸을 적셨던 약 내음 가득한 땀..... 거듭되는 수치 측정 채혈 주삿바늘은 발등과 발목 언저리까지 혈관을 찾아 메뚜기 뜀을 하던 지옥 같은 시간들이 있었다. 그리고, 첫 항암 2주 차부터 한 움큼씩 빠지기 시작하던 머리카락... 무서워졌다. 모근까지도 녹여버리는 항암제 탓에 삭발한 머리는 하얗다. 손발가락이 검어지고, 손발톱이 검 자줏빛으로 서서히 변했다. 울었다. 울고 또 울면서 약으로 멍해진 머리로 생각이란 걸 잠깐 한다. 과연 내가 이. 겨. 낼. 수. 있을까?
그렇게 3주일 간격으로 시행된 항암주사 투여가 3차례 끝나고 다시 현상태 검사를 했다. 환각증세를 초래하는 조영제가 무서워졌다. MRI, PET-CT, CT... 혹시 좋아졌을까? 희미한 기대감으로 검사를 받았다. '많이 사라졌는데요. 약발 잘 받으셨나 봐요!' 초음파실 선생님의 한마디에도 더 할 수 없는 희망을 품는다. 담당 교수님이 3차 항암까지 효과가 있다며, 마저 3번 더 바로 진행하자신다. 수술은 부분절제도 가능하겠다며. 뛸 듯이 기뻤지만, 체력 떨어진, 그것도 한여름 3번 더 진행된 항암약물치료 과정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남편 손에 이끌려 들어가는 항암주사실 근처의 들큼한 냄새조차도 구토를 일으키고, 주사액 든 병이 오기도 전에 검은 봉지만 봐도 진저리 치며 온몸에 식은땀 범벅되곤 했다. 항암주사 후 어김없이 바닥으로 내려간 면역 수치로 면역주사 맞으러 가는 - 집에서 1시간여 병원 가는- 길 위에서 벌써 초주검 되었고, 병원 내 화장실까지 전력 질주해도 참지 못하고 흘러내렸던 구토로 창피와 자기모멸로 눈물 흘렸던 순간이 있었다. 살기 위해 들어야 하는 수저의 무게가 천근만근으로 느껴지던 순간 차라리 죽음이 내 곁에 있으니 손을 덜컥 잡고 싶었다. 살아야겠다는 의지조차도 잡아먹혀 버렸던 시간이 지나갔다. 그 모든 순간들을 함께 이겨내 주는 남편과 아이를 위해서라도 살아야 한다는데... 살 의미를 가끔씩 잊어버릴 만큼 힘든 과정이었다.
8월 20일, 마지막 6차 항암치료가 끝났다. 희미하게 미소가 떠올랐다. 남편이 더 기뻐한다. 다시 검사가 이뤄졌고, 작은 기적이 찾아들었다. 수술실에 들어가서 열어봐야 하지만 암세포는 거의 사라진 듯 보인다한다. 최종 '오른쪽 유방암 2기 말'로 초기 임파선 전이가 있는 걸로 진단 내려졌다. 2009년 9월 7일, 수술을 했다. 여러 번의 항암제와 다른 약물들로 간수치가 수술 마취에 영향 줄 정도로 조금 좋지 않았다. 간수치를 내리는 주사액을 맞고 수술실로 들어갔다. 감시림프절 생검에서 전이가 나오면 겨드랑이 임파선을 몽땅 절제해야 하며, 암세포가 그래도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것과 100% 없앤 것은 의미가 다르다 한다. 수술실에서 나온 후 나는 한 번도 통증을 호소하지 않았다. 지독한 항암도 견뎌냈지 않은가. 이 정도 통증은 참을 수 있어! 다행히 교수님께서 수술에 들어갔더니, 생검도 깨끗해서 암세포도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한다. 겨드랑이 임파선 6개 정도 떼어내고, 최초 종양 발생 부위를 절제해냈다. 수술 후 유방암환자의 질적인 삶을 최대한 고려하신 걸로 알고 있다. 참으로 감사드린다. 수술 후 교육받은 팔운동으로 -무거운 것과 과다사용은 못하지만- 일상생활은 가능하다는 것만 해도 얼마나 다행인지.... 11월엔 33번의 방사선 치료를 거쳤다. 일주일에 5일을 매일 지하철로 통d원치료를 하며 공황발작을 만나게 되었다. 그래도 살아있다.
수술 이후 3개월 차 검진을 받고, 이제 2010년 9월 7일이면, 수술 후 만 1년이 된다. 그날 다시 모든 체크를 받을 예약이 되어있다. 암을 선고받았던 날에 내 인생을 되돌아보고, 나 자신 모두를 바꿔야 한다는 조언을 들었다. 사실 그러질 못했다.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기농으로 모든 음식을 바꾸려 했으나 쉽지 않았고, 운동이 중요하다 해서 해보기도 했으나, 지속적이지 못하다. 날 찾기 위해 꼭 해보고 싶은 여행도 해보고, 콘서트도 가보고, 팬클럽 가입도 해본다. 그림 공부도 하고, 문학공부도 해본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마음 다스리기가 쉽지 않다. 쉽게 스트레스를 받고 상처 받는다. 우울함이 찾아들기도 한다. 떨칠 수가 없다. 너무 빨리 내게 주어진 갱년기에, 암 치료과정에서 피폐해진 몸과 마음을 다스리기가 힘들어 쩔쩔매기도 한다. 하지만, 1년 전 포기하고 싶을 만큼 힘듦을 이기고, 난 살. 아. 있. 다. 생존율 가장 높다는 유방암이라지 않은가? 살아있어서 기쁘게 할 수 있는 일들이 아직 남아있음을 인식하고, 내게 허락하신 삶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아가야 함을 안다. 나의 아픔을 함께 해주고 고통을 덜어주려 애쓴 가족, 이웃에게 감사의 보답으로도 열심히 살아야 함도 안다.
*윗글은 2010년 11월 국민건강보험 건강검진 체험수기 공모를 위해 썼고, 입상하였다. 원글에서 수정되었다.
그 후) 국민건강보험에서 2010년 12월부터 중증환자 개인 부담률을 5%로 낮추었다.
나는 첫 암 치료를 하고 우울증세로 심리치료를 받았고, 그 후 몇 년간 항암 주사액 트라우마로 홍차, 히비스커스차와 같은 붉은빛 음료를 한동안 마시지 못했다.
2017년 11월에 8년 차 정기검진에서 왼쪽 유방암을 진단받아 또다시 중증환자가 되었다. 두 번 모두 삼중음성으로 진단받고 유전자 검사를 권유받았다. 검사 결과 '브라카 원' 판정을 받고 기대수명을 늘리기 위한 암 예방차원으로 자궁과 난소 절제 수술을 받았다. 두 번째 치료과정에서 알게 된 사실 하나는 오른쪽 겨드랑이 임파선은 6개가 아니라 거의 전체 제거되었다는 것이다. 첫 수술 후 오른쪽 팔의 감각이 거의 5년이 지나서야 돌아왔던 이유였다. 이제는 양팔에 혈압측정과 주삿바늘 삽입이 되지 않는 ARM SAVE... 혈액검사, 조영제조차도 발등으로 받아야 하는 나는... 그래도 살. 아. 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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