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무 둥치를 꺾어 돌아서My story 2020. 5. 8. 14:55
뙤약볕 아래 숨이 턱에 차도록 달려 나무 둥치를 탁! 치고 되돌아 냅다 달려온다.
등 뒤로 간당간당 친구들이 뒤따라 달려오고, 난 죽을 둥 살 둥 달려댄다. 자빠질지언정 멈춤은 없었다.
내 삶도 나무둥치 반환점을 치고 되돌릴 수 있었을까 라는 물음을 가끔 해본다.
서울로 대학을 왔더라면, 첫 직장으로 제주에서 시작했더라면, 모 항공사 최종면접에서 좀 더 강력한 의지를 내보였다면, 다른 이와 결혼했다면과 같은 생각을 해 보기도 한다.
어김없이, 나는 한 바퀴 되돌아 반환되는 인생은 바라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둥치를 돌아 15도, 23도, 40도, 50도 꺾어 나가 전환된 가보지 않은 다른 길을 걸어가려 애썼던 거 같다.
선택을 요구당하는 매 순간 수많은 가정을 하고 후회 없는 최선이 되길 간절히 바라며 내 선택을 후회하지 않으려 안간힘 썼던 것도 같다. 달리고 걷다가 마주하게 되는 높은 벽이나 낭떠러지나 없는 길 위에서, 기어오르거나 날아가거나 헤쳐나가기를 하고 싶었지 되돌아 나오긴 싫었다.
그 전환점에는 각도를 틀어 돌아나갈 수 있게 만들어 주는 나의 나무 둥치 '글'이 있었다.
글을 읽게 되어 좋았다.
기역니은 디귿을 깨치고 글을 읽을 수 있게 되어 어린 시절 숨을 곳을 찾을 수 있었다.
미시시피 강을 허클베리핀과 함께 뗏목 위 노를 젓고, 살인자를 찾아 베이커가 221B에서 셜록과 함께 추리하고, 기암 동굴 축축한 길을 루팡과 함께 신출귀몰 도망을 갔으며, 유리가면 속 여주인공 되어 연극을 하고, 마리 앙뜨와네뜨를 지키는 오스칼을 사랑했으며, 그날따라 너무 운수 좋아 펑펑 울 수 있었던 두 손에 쥐어진 책이 있어 숨을 공간 한 평이 주어졌다. 불안했고, 어둡고, 축축하고 슬펐던 시간들을 벗어나 숨을 곳을 '글'을 읽을 수 있어 얻었다.
글을 쓸 수 있어 행복해졌다.
살아가다 보니 너무 캄캄하여 가야 할 길을 잃어버릴 때가 불쑥불쑥 다가왔다.
뽀얀 연무에 코가 막히고 눈이 가려져 곧 죽을 듯 무너질 때, 내가 이렇다 저렇다 가슴속 분노를 토해 낼 곳이 없을 때
기역니은 디귿을 깨치고 글을 쓸 수 있게 되어 살아가며 숨 쉴 곳을 찾았다.
손바닥만 한 종이는 아무말없이 내가 쏟아내는 모든 것을 고스란히 받아준다. 잘했다 못했다는 아무 지적 없는 빈 종이에 깨알같이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칠 수 있다.
'그래그래, 사각사각.....'
그저 들어주는 '글'이 있어 나를 토닥여 진정시키고, 나를 객관화시켜 가감 없이 고스란히 보여준다. 마치 거울처럼.
배설해 낸 내 글들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서면 때로는 위로를 주거나 때로는 '그 별거 아니야'라고 희석시켜주거나 '그땐 그랬으면 안 되었어'라고 부끄러움을 느끼게 해주기도 한다. '글'을 쓸 수 있어 내 안의 독소를 쏟아내고 숨 쉴 수 있다.
나는 머리가 복잡하거나, 속 시끄러울 때 글 속에 숨거나, 글 속에서 숨을 고르면서 향해야 할 길을 찾아냈다.
20200508 0511 0512
'My sto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형도'를 샀다. (0) 2020.06.04 엄마의 도시락 (0) 2020.05.19 The Bell Jar (0) 2020.04.16 연필 (0) 2020.04.02 나만의 '어린 왕자' (0) 2020.03.25